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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공식리뷰단] <제34회 춘천인형극제>_ 관람자 윤소정
작성자시스템관리자
등록일2022-09-29 17:20:43
작품명 : EH Man He
관람일 및 장소
: 2022.8.27.토 / 10:30 / 대극장
관람자
: 윤소정, 이규강(신남초4), 이규안(신남초2)

스페인 극단 Zero en Conducta의 는 현대무용과 인형극을 접목하여 자신들만의 무대언어를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극을 보는 내내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몸의 언어’가 인상적이었는데, 무용수 다섯 명의 몸은 다른 오브제 없이도 테이블, 절벽, 산, 오르막길, 비행기, 내리막길 등, 극의 모든 장면을 표현할 수 있었다. 몸의 언어는 신기할 정도로 절제미가 있었고, 또 무용수들의 안정된 합을 통해 단 한번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2~5명의 무용수들로 움직임에 계속해서 변주를 주어, 극이 끝날 때까지도 집중력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극은 상징적으로 표현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몸의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겨 멍하니 관람하다보면 극 자체를 놓치기 쉬운 작품이기도 하다. 이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히 알기 어렵다면, 이해할 수 없는 유려한 몸의 움직임만을 보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중간과 끝 부분에 신(?) 혹은 내레이터의 전언이 이 극에 포함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용수들의 손으로만 표현된 신(?)의 얼굴과 입이 압도하는 순간, 극의 제목 에서 man이 ‘손’을 뜻하는 스페인어가 맞다면, 그 전언은 이 극을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선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느낌으로만 그 전언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있었다. 해당 내레이션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졌다면, 극을 이해하는 데에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는 어둑한 분위기에서 시작하여, 갇혀있는 답답함을 표현하다가 비로소 자유를 얻은 유영을 보여주기도 하며, 인형에게 ‘숨’이 생겨나는 그 순간을 포착한다. 그리고 인간으로부터 분리된 그 인형을 통해, 좌절하고 모험하고 안간힘쓰고, 빛을 희구하며 ‘숨’이란 것이 무엇인가 묻는 작품이라고 한다. 호흡을 하는 그 간단한 동작에 얼마나 많은 근육들이 사용되는지, 얼마나 많은 의문과 생각들이 넘쳐나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simple breath, 그러나 “숨차다. 멈추고 만다.”

 

15세 관람가 아니고요? 힝, 소름끼치는 무서운 분위기. - 이규강(신남초4)

 

 

작품명 : 꼬마농부 라비
관람일 및 장소
: 2022.8.27. 토 / 13:00 / 코코극장
관람자
: 윤소정, 이규강(신남초4), 이규안(신남초2)

‘두근두근 시어터’의 <꼬마농부 라비>는 지난 해 춘천인형극제에서 관람했던 ‘할머니의 이야기치마’가 무척이나 재밌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선택한 작품이었다. 이야기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 극단인지, 그 안에서 관객과 호흡하고자 하는 의도, 압도되는 무대장치와 소품 활용 등에서 이미 기대를 갖고 관람을 시작하였다.

<꼬마농부 라비>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두더지 라비는 자연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아삭아삭한 당근도 무척이나 감사해하면서 먹지만, 농부 아저씨에게 자신은 농사를 망치는 해로운 동물로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두더지 라비는 자신이 얼마나 자연과 식물을 사랑하는 동물인지 증명하기 위해 직접 식물들을 키우고 돌보고 진짜 농부가 되기로 한다.

진짜 농부가 되기 위한 방법을 찾으러 깊은 숲속에 사는 마법의 용 ‘푸(?)’를 찾아가면서부터 라비의 모험이 시작된다. 용이 준 나무막대기를 화분에 심고 물을 주고 햇볕을 쏘이고 거름을 주었으나, 과유불급, 나뭇가지는 쓰러지고 나뭇가지는 부러지고 만다. 그렇게 라비는 비와 바람과 햇볕과 달빛과 물의 작용을 깨달아가고, 마침내 마른가지에서 싹을 틔우는 데에 성공한다. 키우고 돌보는 데에 드는 ‘노고’에 대해 단순하고 흥미롭게, 시종일관 볼거리로 가득하게 극을 이끌어간다.

특히 옥황상제의 등장이 무척이나 재밌었는데, 그가 비와 바람을 몰고 오고, 두더지 라비에게 장난을 치는 장면들에서 정말로 크게 웃었다. 해와 달이 빙글빙글 돌고 마침내 비를 내리게 해줄 때, 바람이 불어 구름이 물러날 때 등, 날씨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는 것도 무척이나 좋았다. 언제든 물을 살수할 수 있고, 햇볕이 강하면 그늘을, 빛이 모자라면 전등으로, 자연적인 날씨와는 전혀 상관없는 농업의 시대에 옥황상제의 장면은, 날씨에 따라 움직이는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극이 진행되는 완성도에 비해 어쩌면 ‘키우고 돌보는 데에 드는 노고’라는 결론은 조금 쉬운 선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해 <할머니의 이야기치마>가 마지막엔 쓰레기를 잘 처리하자는 교육적인 내용으로 마무리되었듯이, <꼬마농부 라비>도 ‘무언가를 키우고 돌보는 노고에 감사하자’는 내용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는 극단이 추구하는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으나, 관람자의 입장에서는 마지막에 ‘이렇게 이렇게 느끼면 됩니다’하고 관람의 가이드라인을 정해주는 것이 과연 좋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시종일관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제공해놓고선, 정답을 규정함으로서 축소시키는 느낌. 그것도 극의 드라마터그와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정답’을 내는 것.

 

생각해볼 문제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더 크게 확장될 수 있는데, ‘두근두근 시어터’의 극은 이미 재미나고 유쾌하고 이미 도덕적으로 건강한데. 굳이.

 

“라비가 넘어져서 나뭇가지가 부러졌을 때가요, 제일 인상 깊었어요!”

“넘어진 게? 왜?”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으러 가잖아요! (웃음)”

-이규안(신남초2)과의 대화

 

 

작품명 : 그의 하루

관람일 및 장소 : 2022.8.27. 토 / 16:00 / 축제극장 몸짓

관람자 : 윤소정

<그의 하루>는 기대를 많이 했던 작품이었다. 최근 인형극에서의 관람층이 성인으로 제법 확대가 되고, 어른이 읽는 동화처럼 어른이 보는 인형극의 영역이 무척이나 반갑고 또 ‘예술무대 산’의 작품이라 더더욱 기대하였다.

우선, 한 사람의 배우가 그 모든 감정을 표현해해는 그 진지함에는 경외심이 들었다. 찰리채플린처럼 인생을 아는 자의 익살스러운 표정 하나만으로도 ‘삶’이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영역으로의 경외심임에 분명하다. <그의 하루>같은 작품과 그런 시도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기꺼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하루>에서 표현하는 그의 하루는 그저 우리가 그런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공감하는 쪽에 가깝다.

<그의 하루>는 주인공인 그가 술에 취해 퇴근을 하고 이불을 돌돌 말고 누에고치처럼 잠이 들었다가 깨면서부터 시작된다. 아침에는 버스를 놓치고, 회사에서는 상사에게 핀잔을 당하고, 보고서를 제출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과정을 거쳐 주인공은 퇴직을 한다. (사실 완전히 퇴직이라고 말하기에는 곤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사로 표현되는 인형의 크기가 비로소 주인공과 같은 크기가 되었던 장면을 빌어, 나는 그것이 퇴사라고 생각되었다.)

그 후에 그는 컨베이어 벨트의 물건처럼도, 어항 속 물고기로도, 시간에 쫓기는 존재로, 똑같은 큐브로 성형되는 존재로, 외줄타기 같은 서커스를 하는 존재로, 목줄을 쥔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개로 여러 번 의미가 전환된다. (전환이라고 말해도 좋을, 주인공은 그 모든 상징들 그 자체이겠으나 나열된 형태로 보아 전환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엔 ‘죽음’을 짐작하게 하는, 심해에서 헤엄치는 듯 한 주인공의 모습 으로 끝이 난다. 그것이 주인공의 상상인지 실재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이 극에서 도대체 현시대의 인간이 어떤 존재일까 생각했다. 나는 소품화되거나, 정형화되거나, 아슬아슬하거나, 주체성을 잃고 부유하는 현대인을 모두 알지만, 그 모든 것을 정말 이 극에서 말하려고 했다면, 좀 더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을 버무려놓은 느낌으로는, 오히려 현대인의 고뇌를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 모든 상징들과 설움들을 내가 모두 한 데 버무려 표현해보겠다는 드라마터그적인 장치가 있었어야했다고 생각했다. 그 모든 상징들과 그 모든 감정들을 마무리하는 상징이 ‘어항 속 물고기’인 데에 어떠한 개연성이 있는가. 어항 속 물고기는 그 모든 상징들을 포함할 수 있는가. 하나의 대표상징을 두지 않고, 삶 속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상징될 수 있는 ‘현대인의 포화상태’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이었다면, 극의 진행과정에서 쓰이지 않았던 또다른(거대한) 상징을 끌어왔어야 했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 많은 상징들 중 하나의 대표상징을 통해 큰 줄기를 형성했어야했다고 생각했다.

너무 많은 상징 속에서 나는 오히려 현대인의 고독을 느꼈지만, 그것이 극 속에서 표현되었는가는 다른 영역이니 말이다.

 

 

작품명 : 스윗 아일랜드

관람일 및 장소 : 2022.9.1.목 / 10:30 / 바우극장

관람자 : 윤소정

‘요술배낭’의 <스윗 아일랜드>는 일상에 지친 주인공이 스윗아일랜드에 가게 되었고, 스윗아일랜드에서 휴가를 즐긴 후 일상에 대적할 힘이 생기는 이야기이다. 그 여행이 실재였는지 상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구에게나 스윗아일랜드 행 티켓이 존재할 수 있다는 환상 같은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일상에 지친 주인공을 보여줬는가?

스윗아일랜드라는 그 곳의 세계관은 명확했는가?

그곳에서 겪은 그 무엇이, 일상을 살아가는 힘으로 작용하였는가?

 

우선, 이 극의 리플렛에는 ‘반복된 일상과 사람들에 치여 점점 지쳐가는 남자’라고 소개되었으나, 시작부터, 반복되는 일상도 사람에게 치이는 것도 크게 느껴지지 않고, 그저 지쳐버린 한 남자만 존재한다.

두 번째, 스윗아일랜드라는 곳은 어떤 세계관으로 존재하는가? 코코넛을 따고, 안락의자가 있고, 바다가 있고, 작은 친구들을 만들고... 쉴 수 있는 여느 여행지와 다를 것이 없지만, 그곳은 달콤하기 그지없는 섬이라고 한다.

일상의 고됨이 전해지지 않고, 스윗아일랜드가 일반적인 여행지로 보여진 후에는 세 번째 물음은 충족되지 않는다.

여행은 누구에게나 명확하게 판타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멀리 떠나는 여행도 마찬가지이고, 일상에서 겪는 소소한 보통여행에서도 모두, 일상을 보다 낫게 살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여행이 그러할까. 그곳에서 무엇을 겪었고, 무엇을 생각했는가에 따라 돌아왔을 때의 느낌은 천차만별일 텐데. ‘여행’이라는 콘텐츠가 갖는 힘에 기대어, 극에서 보여주어야 할 것들을 잊은 것은 아닌가. 오히려 모두가 알고 있는 감정일수록, 극 안에서 더 특별한 의미를 가져야 관객은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퍼펫보다 퍼펫터의 존재감이 자꾸만 드러나는 것이 극의 몰입도를 종종 깼다. 등장인물로 여겨지다가 퍼펫터로 역할임을 알게 되는 그 잠깐의 시간동안, 관객은 극 밖으로 튕겨져 나온다. 그렇게 여러 번 나도 튕겨져 나왔다.

 

 

작품명 : 비둘기

관람일 및 장소 : 2022.9.1.목 / 11:30 / 코코극장

관람자 : 윤소정

‘창작집단 금도깨비’의 <비둘기>는 3인 분절인형극으로 퍼펫터 3인의 절묘한 합이 돋보이는 극이었다. 또한 술 취한 주인공 A씨가 비둘기와 사투를 벌인 다음 날, 몸이 둥둥 떠다니게 된 기본 설정이 무척이나 흥미있었다. 또한 주차고깔이나 전봇대의 전깃줄 등 도시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는 오브제들을 이용하여 극을 진행하는 것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극이 시작되고 흥미를 느끼면서, 순간 이 극이 25분짜리 단막극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불안이 시작되었다. 이토록 흥미로운 것을 표현하다가 어느 순간 극이 그냥 끝나버릴 것 같았다. 내가 관람한 장면들은 장막극의 도입과 발단부분에 해당하는 장면이었고, 남은 런타임동안 전개와 절정, 결말까지를 담을 수 있을까.

내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주인공 A씨가 비둘기가 되어 몸이 떠버린 후, 나는 것이 아니라 정처없이 부유하며 울고, 그러다 겨우 나는 기술을 생각하거나 전봇대를 붙들고 휴식을 취하고, 방귀부스터로 추진력을 얻기도 하면서 점차 나는 것에 익숙해지더니, 그렇게 극이 끝이 났다. 주인공 A씨의 적응기를 요약본으로 본 느낌.

유튜브에서 70분짜리 드라마를 7~8분 만에 주요장면과 줄거리를 소개하거나 하는 영상처럼 말이다. 물론 그 같은 채널의 구독자수가 상당하는 사실을 생각하면, 최근의 관극이란 점점 ‘용건만 간단히’에 가까워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극은 비둘기와 사투를 벌이고 술에 취해 시비를 걸고 다니는 A씨가 이 같은 모험을 겪고 갱생하는 내용을 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그저 피곤하고 어지러운 현대인들이 마음의 중심을 잡고 살아가길 바란다는 소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했다. <비둘기>의 기획의도에는 무척이나 공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의도가 극에 충분히 드러났는가? 몇 번을 생각해봐도 명확하지가 않다.

인간은 환상 속에서 비둘기도 될 수 있고, 날 수 있는 기술을 가까스로 익힐 수도 있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올 뿐이라는 ‘허무함’을 담고자 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나는 그 허무함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허무함이든, 모험을 겪고 난 후 중심을 잘 잡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의 마음이든, 무엇이든 이 극이 말하고자 하는 결론을 명확하게 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