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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공식리뷰단] <겨울:코코바우이글루>_ 관람자 윤소정
작성자시스템관리자
등록일2022-01-21 11:02:47
► 공식리뷰단: 윤소정 & 이규강(신남초3), 이규안(신남초1)
► 관람 작품: 해를 낚은 할아버지(극단 로.기.나래), 돌연한 출발(일장일딴 컴퍼니)
► 관람 일시: 2021년 12월 22일~25일
► 관람 장소: 춘천인형극장 대극장

 

♦ 해를 낚은 할아버지 _ 극단 로.기.나래

‘극단 로.기.나래’의 <해를 낚은 할아버지>는 무엇이든 낚을 수 있는 할아버지가 본의 아니게 해를 낚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할아버지의 낚시실력으로 해가 바다에 빠졌으니, 바닷속이 무척이나 뜨거워졌고, 북극곰은 녹은 빙하를 타고 집을 잃고 표류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아버지와 바다친구들은 차가운 달을 낚았다. 해와 달은 모두 품은 바다의 수온은 괜찮아졌지만, 세상이 온통 암흑이게 되었다. 해파리들의 도움으로 불을 밝혀봐도 해도 달도 하늘로 돌려보내야만 했고, 그들은 힘을 합쳐서 그 일을 해낸다.

그리곤 보상처럼 찾아온 북극의 오로라를 마주하며 극은 마무리된다.

주인공의 실수로 벌어진 어떤 일을 해결하고, 해결될 줄 알았는데 더 큰 난관을 만나고, 더 많은 힘을 합쳐 그 일을 해결해나가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는, 전형적인 극의 형식으로 진행되지만, <해를 낚은 할아버지>는 그 사이사이 생각을 확장시킨다. 특히나 뜨거워진 바다에서 빙하와 함께 표류하는 북극곰의 존재는, 바다의 수온에 따라 생존에 위협을 받는 동물들을 그려냄으로써 지구온난화라는 환경문제를 제시한다. 또 서로 논의하고 실패를 겪으면서도 문제를 해결해나가려고 하는 등장인물들의 소통방식이나, 실수를 한 할아버지를 대하는 바다친구들의 태도 같은 것에서는 결과우선주의에서 등한시되는 인간성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이 <해를 낚은 할아버지>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주 귀여운 퍼펫들의 문제해결극으로 쉽고 명확하게 풀었다는 것이다. 재밌었고, 신났고, 놀라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극이 향하는 방향으로 함께 따라갔다. 할아버지가 해를 빠트려 고민할 때는 같이 울상이 되고, 해를 꺼내 다시 하늘로 돌려보낼 땐 더없이 다행이라고 느꼈고, 달만 남은 바다가 얼마나 추웠을 지 같이 염려하였고, 북극곰을 따라 북극으로 함께 항해하였다.

거기에 광활한 바다와 낚싯배가 떠있는 입체적인 해수면, 심해로의 전환 등을 표현하는 압도적인 무대가 더해져, 더욱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대극장이기에 가능했던, 아니 대극장의 규모를 한껏 활용한 무대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해를 낚은 할아버지>는 김정미 작가의 동명 동화를 원작으로 하는데, 극은 원작 동화의 드라마터그를 최대한 가지고 오면서, 몇몇의 장치들을 추가하여 극으로의 몰입을 높였다.

 

이규안(8): 문어양과 문어군은 동화책에는 없어요.

윤소정(엄마): 그런데 왜 인형극에는 들어갔을까?

이규안(8): 바다친구들이 더 많아야 돼서 그런 거 아닐까요? 바다엔 진짜 많은 생물들이 있잖아요!

 

새로운 등장인물 외에도, 할아버지가 신발을 낚는 장면을 추가함으로써 극의 분위기를 풀고, 극을 열고 닫는 화자로서의 할아버지를 등장시켜 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더욱 명확히 하였다. 또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열고 닫는 것을, 퍼펫터가 아니라 퍼펫의 그림자로 표현한 것이 무척이나 좋았다. 간혹 퍼펫터의 실물이 이야기를 열고 그와는 무척 다른 퍼펫이 극을 진행시킬 때에 이질감이 드는 경우들이 있었는데, <해를 낚은 할아버지>는 그 같은 이질감을 최소화하고, 극의 주인공인 퍼펫에의 몰입을 극대화하였다.

또 무엇이든 낚을 수 있다는 것은 할아버지가 대왕고래를 낚았던 경험이 있다는 데에서 그 개연성을 갖게 되어, 할아버지가 해를 낚든, 달을 낚든 ‘그럴 수 있다’고 느끼게 했다. 의문이 생기면 극으로의 몰입을 방해하기 마련인데, <해를 낚은 할아버지>에서는 사전에 그 의문을 해결하고 시작하는 셈이다. 또 추후에 대왕고래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을 고려해, ‘시를 짓는 대왕고래’라는 설정으로 관객의 주의를 돌리기도 했다. 모르고 있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대왕고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에 관객들이 받을 감동(후련함)까지 배가시킨 것이다.

 

이규강(10): 그런데요. 거북이 등껍질이 타지 않을까요? 태양은 6000도인데요.

 

거북이가 바다에 빠진 ‘해’를 심해에서 건져 올려 도움을 주는 장면을 두고 첫째아이가 한 말이다. 할아버지가 해를 낚거나 달을 낚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거북이가 해를 이고 오는 것에는 의문이 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한창 과학서적을 봐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 지점에서 ’극적 개연성’ 부분이 조금 흔들린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이규안(8): 다음 인형극은 또 뭐예요? 또 언제 해요? 네?

 

여덟 살 아이가 더 많은 인형극을 보고 싶게 만든 공연이었다. 언제든 공연을 할 때엔 당연히 또 보러오자고 했다.

2021년 올해 춘천인형극제는 사계절 내내 진행된 축제였다. 사실 여러 공연의 밭은 관람은 어른에게도 숨 가쁘기 마련이어서, 길고 오래 함께 할 수 있어서 기뻤다. 친숙해진 덕인지 공연이 없을 때에도 종종 인형극장을 찾아 야외놀이터에서 놀거나 산책을 하기도 했다. 1년에 한번 축제 때에만 특별하게 찾아가는 곳이 아니라, 아무 때나,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공간이 된 것 같아 감사드린다.

 

♦ 돌연한 출발_ 일장일딴 컴퍼니

‘일장일딴-컴퍼니’의 <돌연한 출발>은 2021년 춘천인형극제의 사계 프로그램 중 ‘가을:코코바우 씨어터’ 기간에도 공연되었지만, 해당 기간에는 일정이 맞지 않아 관람하지 못하였다. 2019년 춘천인형극제 당시 공연했던 <줄로 하는 공연 ‘점’> 역시 매우 흥미롭게 관람하였기 때문에 더욱 아쉽던 차에 ‘겨울:코코바우 이글루’에서 재공연된다는 소식에 정말로 매우 기쁘게 향했다. 

그리고 우리는 달리는 말을 보았다.  우리는 그저 달리는 말을 보았다.

<돌연한 출발>은 프란츠 카프카의 동명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이 되었다고 밝히고, 소설의 전부를 낭독하고 극은 시작한다. 말이 달리고, 달리는 말이 뒤편 영사막에 투영된다. 마치 ‘호랑이 모양을 한 고양이’처럼-물론 그 비유는 조금 다른 영역이지만-그 작고 작은 말이 영사막에서는 거대한 말이 되어 끊임없이 달린다.

달리다가 사람들을 지나치고, 장애물을 만나면 뛰어넘고, 컴컴한 밤길에서는 쏟아지는 별구경을 하고, 또 안개 속에서는 속도를 늦추며 잠시 숨도 고른다. 그렇게 달리고 달리다가 다른 말들을 만나 꿈결처럼 함께 달린다.

그렇게 말은 달리고 또 달리고, 나는 눈물이 났다. 아마 아이들과 동행한 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 붙박여 한참동안 눈물을 찍어댔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엄마는 좀 눈물이 났어.” 내가 말했다.

 

그러자 여덟 살 둘째 아이는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물어왔다. “왜요? 말이 달려서요?” 어떤 점이 그랬는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그 아이가, 모든 순간이 혈기왕성하게 기쁘고 쿵쿵대며 사는 걸 좋아하는 여덟 살 아이임을 이해한다.) 그런데 열 살 첫째 아이가 말한다. “저는 알 것 같아요. 저도 좀 뭉클했어요.”

왜 뭉클했는지 묻는 질문에는 “음..” “음..” 하고 오래 말을 골랐다. 끝내도 어떤 점이 좋았는지는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그냥 참, 묘하게 재밌었다고 했다.

 

이규강(10): 말이 달리기만 하는데도 묘하게 재밌었어요. 인형극에 꼭 말이 필요한 건 아니었네요.

 

아마 그 말이 정답일 것 같다. 극이 드라마터그를 가진 것도 아니고, 등장인물도 없으며, 그저 25분간 말이 달리기만 하는 것을, 우리는 본다. 아니,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에 심장박동을 내맡기고서 함께 달리는 것이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고서 그저 숨차게.

 

이규강(10): 말이 우리 자리까지는 안 와서 아쉬웠어요.

 

계속 달리던 말이 해방이랄까, 비상이랄까 싶은 비행을 하면서, 무대에서 객석으로 내려오기도 했는데, 그때에 가까이에서 보지 못한 게 아이가 가진 유일한 아쉬움이라고 했다. 나는 극에서 그 말이 ‘돌연한’ 출발을 했던 것처럼 ‘돌연한’ 비상을 하는 그 순간이 조금 아쉬웠다. 그 비상의 이유가 마음에 와닿지 않았기 때문일 것 같다. 비상과 해방 같은 것은 어떤 개연성 없이도 ‘돌연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말과 함께 완전히 몰두하며 달리던 관객인 나는, 그 돌연한 비상의 순간에 조금 당황하기도 했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나는 아직 조금 달리고 싶은데..

나는 아직 버리고 싶은 것이 있는데..

나는 아직 이 달리기를 끝낼 이유를 못 찾았는데..

 

우연인지, 공연의 리뷰를 쓰기 전에 컴퓨터가 말썽을 일으켜, 며칠 더 해당 공연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는데, 그때에 카프카의 소설을 읽어보기도 하고, 차분히 그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지금 드는 생각은 ‘돌연한 출발’과 ‘돌연한 비상’ 사이에 ‘돌연한 멈춤’이 조금 더 극적으로 드러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었다. 말갈기를 휘날리며 쉬지 않고 그저 달리다가, 돌연히 멈추는 순간 같은 것이 있었더라면. 그러면 그 ‘비상’이 조금 더 해방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작고도 개인적인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 달리는 말은 내내 잊히지 않고 기억되고 있다. 첫째 아이 역시 수일이 지났음에도 그 공연이 주었던 뭉클함을 기억하고 있었다. <돌연한 출발>은 그만큼 특별하고, 사려 깊고, 여러 물음과 여러 대답을 주며 확장된 세계로 관객을 데려간다. 단순히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열망보다는 삶이라는 여정 속에 있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한다.

가능하다면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한 해를 닫는 연말에 다시 관람하고 싶다.

한 해 동안 열심히 달려온 나라는 사람을, 당신이라는 사람을 ‘그 달리는 말’이 또 위로해줄 테니까.